회사에서 집까지 느릿느릿 걸어가면 15분 정도 걸린다. 그 15분 동안 머릿속으로 집에 들어가면 해야할 일들을 떠올린다. 그리고 그 일들을 나름의 복잡하고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알고리즘에 의해 분류한다. 그래, 설명할 수도 없고 꼭 아래의 순서를 따르지도 않고 그날그날에 따라 각 항목의 가중치는 모두 다르겠지만 가령 이런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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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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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야만하는 것과 미뤄도 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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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꺼이 할 수 있는 것과 하기 싫은 것 등.
같은 분류 체계라고 보기는 아무래도 어렵다. 예를 들어 ‘양말 열한켤레 손 빨래 하기’는 할 수 있지만 하기 싫을 수도 있고, 출근할 때 까먹은 음식물쓰레기 버리기는 하기 싫지만 해야만 할 수도 있다. 집 도착하기 전엔 기어이 결론을 내리는데, 현관문을 열 때 즈음엔 오늘 저녁 내게 남은 에너지량을 계산할 수 있다.
오늘 퇴근길을 예시로 들어볼까
1.
손톱 깎기
2.
플라스틱 배달 용기 버리기
3.
베갯잇 바꾸기
4.
양말, 속옷, 지금 쓰는 베갯잇 빨기
5.
티비 뒤에 먼지 털기
6.
이케아랑 다이소에서 산 물건들 정리하기
7.
바닥 부직포로 쓸기
8.
냉장고에 오래 된 반찬 정리
9.
택배 비닐 정리
10.
가습기 통 세척
아마 엄마가 이 목록을 보면 기겁할지도 모른다. 엄마는 일단 바닥은 매일 쓸고 닦고, 택배 비닐들은 진작 분리수거를 했을 것이며 이케아나 다이소 이마트를 다녀왔으면 바로 정리를 하셨을테니까… 그러나 자취 3년차에도 습관이 들지 않았는지 아직 바로바로 해내는 건 어려운게 많다.
꼭, 반드시, 무조건 해야 하는 것
오늘 머릿속에 지나간 10가지 중 무조건 해야하는 것들이 손톱 깎기와 가습기 통 세척이었다. 그리고 기꺼이 할 수 있는 것은 세탁기 돌리는 것인데 이와 맞물리는 액션이 베갯잇 바꾸는 것. 현재 베갯잇을 빨기 위해 벗겼으니 다른 베갯잇으로 교체하는 건 당연하다.
왜 안하는가
이 세개를 제외하고는 도저히 하고픈 의지가 생기지도 않았고 할 힘도 없다. 퇴근이 11시를 넘겼을 뿐만 아니라 의외로 더 많은 움직임을 요하는 항목들도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플라스틱 배달 용기나 택배 비닐은 버리기 위해 다시 집 밖을 나가야 한다. 용기는 세척을 해뒀고 비닐은 한 곳에 모아뒀기 때문에 눈에 크게 거슬리지 않으나 한번 더 나갈 힘은 없어서 패스.
냉장고 반찬 정리도 의외로 간단해 보이지만 그렇지 않다. 우선 선행되어야 할 행동이 두 가지나 되고 이후 처리도 필요하다. 우선 미닉스 더 플렌더 속에 처리 완료 된 가루를 음쓰봉에 넣어줘야 하고, 식기 건조대에 있는 그릇들을 한 번 정리해야 한다. 이 두가지 행동을 하고 나서야 더 플렌더에 오래 된 반찬을 정리할 수 있다. 반찬만 정리하면 되는게 또 아니다. 반찬 통도 설거지를 해야 하지 않는가? 이건 도저히 오늘 못한다.
티비 뒤에 먼지 털기? 의외로 세심한 작업이 필요하다. 먼지 털개를 사용하여 먼지를 스윽- 닦고 구멍에 들어간 먼지는 일회용 행주를 활용해 빼줘야 한다. 그리고 근처에 먼지가 날렸을 수 있으니 돌돌이로 한번 쓸어야 하는데 상상만 해도 지친다.
하기 싫은데 하긴 한 것
바닥 부직포로 쓰는 것도 벌써 귀찮다. 바닥에 떨어져있는 물건은 없지만 부직포를 2~3개를 써서 바닥을 쓸고 혹시 모를 찌꺼기들은 돌돌이로 처리한다. 이게 글로 쓰니 짧은데 여간 신경쓰이는 일이 아니다. 부직포는 서서 밀고 다니니까 큰 문제가 되지 않는데 돌돌이는 쪼그려 앉아서 굴려야 하기 때문에 먼지와 머리카락이 더 눈에 잘보여서 많이 신경써야 한다. 그럼에도 오늘 머리카락이 눈에 너무 잘보여서 결국 이 귀찮은걸 해냈다. 엄청 꼼꼼하게는 못했지만 대충이나마 청소 구색은 맞췄다.
그럼에도 매일 하는 것
그럼에도 하루를 온전히 매듭을 짓기 위해 매일 하는 것들도 많다. 손과 발을 씻고 잠옷으로 갈아입는 것으로 시작으로 퇴근길에 생각했던 할 일 또는 그 이상을 해내고 손을 씻는다. 할 일을 끝내고 손을 씻은 뒤 원하는 핸드크림을 바르는 건 작은 루틴 중 하나다. (한바탕 요리를 하고 나면 손을 네번 씻고 네번의 서로 다른 핸드크림을 바른 적도 있다.) 난 양치 후 세수를 한다. 세수 이후 할 것들이 훨씬 많기 때문이다. 피붓결을 정리하고 에너지가 남아있다면 이지듀 기미 앰플을 에이지알 부스터로 2분 굴려주고 비타민도 발라서 3분 굴려준다. 에너지가 없으면 그냥 손으로 조금 문질문질. 항산화 로션까지 발라주면 얼굴과 볼 일은 끝났다. 이제 앞머리를 올리고 비염인답게 식염수 300ml 로 코 세척을 한다. 할 때마다 늘 이상한 기분이 드는 코 세척이다. 화장실에서 나와 코에 스프레이를 뿌려주고 가습기를 튼다. 이 모든 것을 하고 나서도 에너지가 남아 있다면 이렇게 책상에 앉아 맥북을 펼치거나 다이어리를 쓴다.
“매일”이라고 썼지만 이 모든 과정에서 에너지가 방전 되는 순간 바로 침대행이다. 그러지 않으려고 노력하지만 웃을 기력도 남아있지 않는 날도 분명 있으니까.
오늘을 잘 매듭지어야 내일의 첫 단추를 잘 낄 수 있다.
그러나 첫 단추를 늘 잘 낄 필요는 없다.